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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 - 나만의 돋보기/이벤트용 서평

<서평> 합스부르크, 세계를 지배하다

책 표지

*합스부르크라는 가문은 매우 미묘한 느낌을 주는 가문이다. 조금이라도 유럽여행을 하거나 유럽역사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합스부르크라는 이름을 한번이라도 들은 적이 있을 것이다. 이 세상에는 수많은 왕조들이 나타났다 사라졌고 합스부르크 가문 혹은 왕조도 그러하지만 그 무엇보다 합스부르크 가문 혹은 왕조가 유명한 이유는 유럽 역사에 큰 족적을 남겼기 때문이다. 긍정적으로든 부정적으로든 합스부르크를 빼면 유럽 역사를 안다고 할 수가 없다. 이 책은 합스부르크 왕조에 대해 입문하는 책 중 하나가 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우선 합스부르크 왕조의 역사가 곧 오스트리아의 역사인 것은 아니다. 오스트리아라는 나라를 개국한 가문이 합스부르크가 아니기 때문이다. 이 책에서조차 합스부르크 가문의 진정한 시조가 누구인지, 그의 행적이 어디서부터 시작되었는지 알 수 없다고 서술한다. 그럴만한 것이 최초의 합스부르크 가문이 생겨난 장소는 오늘 날 스위스 북부지방인 아르가우로 추정되기 때문이다. 가장 오래된 인물은 서기 991년에 사망했다고 알려진 칸첼린이라는 귀족이었다. 이 칸첼린의 두 아들인 루돌프와 라트보트 중 라트보트의 후손들이 합스부르크 가문을 이어갔다. 합스부르크라는 이름도 라트보트가 아끼던 사냥 매가 앉아있던 자리를 가리켜 ‘하비히츠부르크(Habichtsburg)’ 즉 매의 성이라 부르면서 그 지역에 요새를 건설하는 것으로 시작했거나 독일어로 항구나 여울을 가리키는 Hafen이 붙어서 합스부르크가 됐다고 추정한다.

먼 훗날,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 1차 대전의 패배로 지구상에서 사라지기 직전, 황실의 족보학자들이 어떻게든 합스부르크 왕조의 시조를 연구하기 위해 노력하면서 온갖 시행착오를 벌였다는 지적이 초반부터 서술된다. 1000년 전부터 합스부르크 가문은 자신들의 행적을 부풀리거나 자신들에게 부여된 권리를 증명하는 문서들을 위조하는 식으로 정치적인 영향력을 쌓아갔고 한편으론 다양한 자녀를 두고 그 자녀들이 무사히 성장하여 생존하는데 성공하고 다른 가문들의 상속자들의 대가 끊기는 것을 기회삼아 영지를 늘리는 식으로 성장했다. 중세시대 내내 합스부르크 가문은 신성로마제국의 강력한 귀족 가문이 되기 위해 노력했다.

불행이도 카를 4세 황제에 의해 합스부르크 가문은 신성로마제국에서의 주요 입지를 잃게 된다. 의도적으로 다른 귀족 가문들에게 견제를 받게 되고 설상가상으로 원래 근거지였던 스위스 지역도 반란으로 인해 상실할 위기에 처하자 이때부터 합스부르크 가문은 오스트리아 영지를 가꾸기 시작했다. 원래 오스트리아 지역은 ‘바벤베르크’라는 이름의 가문이 다스리고 있던 땅이었는데 바벤베르크 가문을 도우면서 세력을 넓혀가고 이들의 세력들을 흡수하고 자신들의 과거를 로마시대의 율리우스 카이사르와 폭군 네로 시대까지 올려가면서 자신들만의 건국 신화를 만들어간다. 예를 들어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친척이 오스트리아 지역(로마시대엔 판노니아로 불리던 곳)을 다스릴 수 있는 권한을 받았다는 전설을 만들고 이 문서가 대대로 이어져왔다는 문서도 만드는 식으로. 물론 당시에도 이런 속임수를 지적하는 무리들이 있었고 이걸로 인해 곤욕을 치르기도 했으나 여러 가지 정치공작과 역사의 흐름으로 인해 합스부르크 가문은 어느덧 왕조라고 부를 수 있는 집안이 된다.

지기스문트와 막시밀리안, 카를 5세에 이르러서는 혼인 정책으로 이탈리아 일부, 한방의 전투 패배로 멸망한 헝가리 땅 일부, 에스파냐의 왕권을 얻고 라틴 아메리카 전역을 제패한 콩키스타도르들 덕에 합스부르크 왕조는 세계를 지배하는 거대 왕조가 되기도 했다. 애석하게도 황실 존속을 위해 부득이한 근친혼의 영향으로 에스파냐의 ‘압스부르고’왕조는 1700년대에 대가 끊겨 멸망하고 만다. 족보로 따지면 에스파냐계 합스부르크가 오스트리아계 합스부르크의 정통성을 능가하는 본가였기에 졸지에 합스부르크 왕조는 1700년대에 세계 절반을 지배하는 해상제국에서 동유럽 일부를 관리하는 왕조로 전락하고 만다.

마치 스위스에서 발흥했다 그 지역을 잃고 독일의 패권을 가지려다 실패하여 오스트리아로 후퇴하고 에스파냐와 중남미 전역, 태평양 일부까지 제패하다 대가 끊겨 모조리 상실하고 동유럽으로 후퇴하는 방식이 합스부르크 가문의 역사 진행방식이었다. 그럴 때마다 가문의 일원들은 과거의 추억을 간직하면서 ‘세상을 지배하는 최강의 가문이 되겠다’는 마음은 버리지 않으며 열심히 역사를 써갔다. 긍정도 부정도 할 수 없는 교활하고 잔혹하거나 지혜로운 전략을 써가며 생존을 위해 이어가던 이 책의 후반 부분은 마리아 테레지아 황후와 제국의 실질적인 마지막 황제인 프란츠 요제프 1세의 일대기로 구성됐다.

 

사진 자료1
사진 자료2
후반부 페이지


어떤 정책들은 당시에 어찌 그런 정책을 펼칠 수 있었을까하는 놀라움 혹은 이렇게 한심할 수도 있을까하는 생각을 동시에 가지게 하는 행동을 역대 지도자들의 행적을 통해 알 수 있었는데 그 중엔 함부로 단언하기 힘든 부분도 있었다. 가령 마리아 테레지아의 아들인 요제프 2세는 사람들을 돕지 않고 사치를 일삼는 가톨릭 수도원과 성당들을 개혁하기 위해 폐쇄하고 성직자들의 월권을 용납하지 않았는데 이 과정에서 수십 만 권의 옛날 서적들이 사라졌다고 전해진다. 역사학을 공부하는 사람들 입장에선 대재앙이나 다를 바 없지만 당시 사람들에겐 요제프의 개혁이 반드시 필요했을 것이다. 가장 제위기간이 긴 국가지도자 중 하나로 알려진 프란츠 요제프 1세의 초기 집권 시기는 잔혹한 압제나 다를 바 없었다. 그가 아닌 다른 사람이 황제가 됐으면 오스트리아 그리고 합스부르크 왕조의 운명이 얼마나 바뀌었을지도 궁금하다.

어떻게 보면 1차 대전의 결과로 인해 1천년 동안 유럽 역사를 좌지우지하던 합스부르크 가문은 졸지에 몰락하고 동유럽의 거대제국 오스트리아-헝가리는 역사 속으로 사라졌기에 그들은 억울함을 호소할 수도 있을 것이다. 결과론적인 이야기지만 현재 동유럽 발칸반도에서 일어나는 끔찍한 민족갈등 때문에 오히려 합스부르크 가문이 다스리는 제국이 존속했으면 어땠을까하는 아쉬운 소리를 하는 역사학자들이 한둘이 아니다. 이번 시간은 이 이야기를 거론할 것은 아니기 때문이 이만 글을 마친다.

역사를 전공하는 사람들이나 인문학에 관심을 가진 사람들에게 있어 가장 어려운 난이도를 자랑하는 역사가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역사라고 한다. 그도 그럴 것이 얼마든지 분열할 수 있는 위기를 어떻게 합스부르크 가문-왕조가 관리하고 모면했는지 알아야 하고 보헤미아(체코),루테니아(우크라이나),마자르(헝가리),트란실바니아-에르데이(루마니아),독일인까지 여러 민족들이 얽혀있기에 각 민족의 언어와 문화를 알아야 하고 복잡한 동유럽의 지리(예를 들면 카르파티아 산맥과 도나우 강, 헝가리 분지 등)까지 공부해야 하기 때문이다. 이 책은 합스부르크 가문에 대한 역사책으로 볼 순 있어도 오스트리아의 역사라고 볼 수는 없다. 이 외에 오스트리아의 역사를 파고들려면 다른 공부도 필요할 것 같다는 취지다.

합스부르크 가문이 역사 속에서 발버둥 친 기록은 앞으로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또 다른 삶의 실마리가 되어줄 수도 있을 것 같은 느낌을 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