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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 - 나만의 돋보기/개인용 서평-문학

<개인서평> 2종류의 번역본으로 비교한 ‘돈키호테’ 제1권

책 표지, 시공사판과 열린책들판

 

 

*돈키호테하면 무엇이 생각나는가? ‘소설책을 너무 많이 읽어서 그만 정신이 나가버려 풍차를 향해 돌격하다가 망신이나 당하는 노망난 영감의 이야기’일 것이다. 주로 이미 퇴물이 되어버린 기사 계급을 조롱하는 소설로만 알려진 게 대부분이다. 나도 그렇게 생각했고 그저 학교 교과서에서 ‘화약 무기의 발달로 비참하게 몰락한 말타는 기사 계급의 애환을 다루는 상징적인 존재’로만 언급되는 것이 돈키호테의 이미지다.

하지만 한편으론 이 돈키호테라는 작품은 ‘세계 최초의 소설’이라는 명예도 갖고 있다. 흔히 최초의 소설이라고 불리는 작품들은 돈키호테 외에도 이탈리아에선 2세기 로마제국의 작가인 루키우스 아풀레이우스가 쓴 ‘황금 당나귀’와 보카치오가 쓴 ‘데카메론’을 거론하고 일본에선 11세기 헤이안 시대의 궁정작가 무라사키 시키부가 쓴 ‘겐지 모노가타리’를 거론 한다. 4개의 작품 중 어느 것이 진정한 최초의 소설인지는 각자 명분이 있으며 우열을 가릴 수 없는 매력들이 있다. 확실한 건 전 세계적인 기준으로는 돈키호테를 ‘현대소설에서 보이는 재미있는 구성을 가진 작품’이라는 평가를 받는다는 점이다. 돈키호테 이전에도 위대한 걸작들은 존재했다. 라블레의 ‘가르강튀아와 팡타그뤼엘’도 있고 그 유명한 단테의 ‘신곡’도 있으니까, 그럼에도 왜 세르반테스라는 에스파냐인이 쓴 돈키호테가 가장 유명한 것일까? 그런 막연한 호기심과 ‘미치광이 노인이 저지르는 기괴한 사건들’에 대한 약간의 동정심이 나로 하여금 돈키호테라는 책에 몰두하게 만들었다. 한국에선 가장 완역이 잘 이루어진 판본이 2종류로 알려져 있는데 <시공사>에서 출간, 박철 교수님이 번역한 ‘재치있는 시골귀족 돈키호테 데 라만차’가 하나요, 다른 하나는 <열린책들>에서 출간, 안영옥 교수가 번역한 ‘기발한 이달고 돈키호테 데 라만차’다. 안영옥과 박철 모두 스페인어 관련 저술 및 번역활동에서 훌륭한 활동을 이어가시기에 돈키호테의 번역본은 두 출판사의 책을 같이 읽는 것이 좋다고 생각한다. 시공사 출간본의 경우 좀 더 쉽게 읽을 수 있게 편안한 문장으로 번역됐고 열린책들 출간본은 고풍스러운 만연체가 느껴지는데 오히려 나의 경우 열린책들 출간본이 더 재밌게 읽혔다.

 

열린책들판 설명
시공사판 설명
열린책들판 옮긴이는 안영옥 박사님
시공사판 옮긴이는 박철 교수님
열린책들판의 오프닝
시공사판의 오프닝


재밌는 건 시공사와 열린책들에서 각각 번역된 돈키호테 원서도 종류가 다르다는 것이다! 모두가 알다시피 돈키호테는 1605년에 세상에 모습을 드러냈는데, 시공사판이 번역한 원본은 1987년 Editorial Gredos에서 출간된 판본(비센테 가오스 주해)이고, 열린책들판은 1980년 Planeta S.A.에서 출간된 판본(마르틴 리케르 주해)이라는 점이다. 때문에 두 책에서 특정한 구절이나 단어, 역사적인 사건이나 인물명에 대해 설명하는 주석도 각자 다르고 시공사에서 주석이 없는 구절이 열린책들판에선 주석이 존재하는 경우도 있다. 이 때문에 조금이라도 에스파냐인들의 자존심 그 자체인 돈키호테를 제대로 즐기려면 두 출간본을 동시에 읽어나가야 한다고 생각한다. 보통 시공사판에서 한 챕터를 먼저 읽고 다시 열린책들판의 같은 챕터를 다시 복습차원으로 읽는 게 재미를 더 할 수 있다.

시공사판의 장점은 좀 더 상황 묘사를 쉽게 이해할 수 있고 마치 조선시대의 민담을 읽는 친숙함을 느낄 수 있다는 점과 열린책들에서도 볼 수 있는 귀스타브 도레가 그린 삽화가 더 많이 수록된 점이다. 열린책들의 경우 고유명사와 에스파냐 고유속담을 의역해서 번역하고 주석으로 따로 ‘원문에는 이렇게 쓰여 있는데 이는 직역하면 이렇게 불린다’라는 식으로 알려준다.

각 번역본의 차이를 비교하는 것도 소소한 재미를 준다. 그 예시로는 아래와 같다.

(1부 4장, 농부로부터 어린 소년을 구해내며 돈키호테가 농부에게 일갈하는 대사)
열린책들판 - 향수까지 뿌려 줄(주:‘더 좋게 쳐준다’는 의미다) 필요는 없소. 돈키호테가 말했다. “그 돈만 지불해 주시오. 그것으로 족하오. 반드시 맹세한대로...”
시공사판 - “덤까지 주겠다니 고맙소.” 돈키호테가 말했다. “이왕이면 레알 은화로 주기 바라오. 그리고 맹세한 걸 꼭 지키도록...”

(같은 1부 4장에서 행상인단의 하인 하나가 돈키호테를 두들겨 패는 장면을 묘사)
열린책들판 - ...그런 다음 더 가까이 다가가 창을 집어 토막 낸 뒤 그중 하나로 우리의 돈키호테를 얼마나 두들겨 팼는지, 갑옷과 투구를 입었다고는 하나 온몸이 맷돌에 갈린 밀처럼 되어버렸다.
시공사판 - 그자가 돈키호테에게 다가가 그의 창을 집어 들더니 여러 조각을 내어 그중 한 조각으로 우리의 돈키호테를 마구 두들겨 패기 시작했던 것이다. 돈키호테는 갑옷으로 무장했음에도 묵사발이 되어버렸다.

(1부 8장, 비스카야(바스크 자치주의 한 지방)인이 돈키호테에게 시비거는 대사)
열린책들판 - “내가 기사가 아니라고? 기독교인으로서 하느님을 두고 맹세컨대 네놈은 거짓말쟁이다. 만일 네놈이 창을 버리고 칼로 덤빈다면 누가 원하는 것을 얻을지 보게 될 것이다. 이래봬도 비스카야 사람이라면 육지에서나 바다에서나 악마에게서나 다 기사님이시다. 이놈아, 이래도 계속 거짓말을 할래?”
시공사판 - “내가 기사가 아니라고? 그리스도교 신자로서 하느님께 맹세하건데 네놈은 거짓말쟁이다. 창을 버리고 칼을 뽑는다면 내가 고양이를 얼마나 빨리 물속에 집어넣는지 볼 수 있을 것이다. 비스카야 인이야말로 육지에서나 바다에서나 악마가 보더라도 진짜 양반이지. 딴소리하면 전부 거짓말인 줄 알아라.”

이렇게 세부적으로 대사가 전혀 다른 경우도 있고, 혹은 주석으로 원전의 글은 이랬다고 설명하거나 반대로 직역 후에 주석으로 이것은 이런 뜻이라고 설명하는 차이점이 있다.

또 4부의 41장에선 열린책들판에선 ‘사르헬’이라고 표기되고 주석으로 알제의 도시라고 쓰여져 있는데 시공사판에선 그냥 ‘셰르셸’이라고 표기되어 있고 주석도 더 간단하게 설명된다. 작 중 언급되는 무어인 갑부의 이름도 열린책들판에선 ‘아히 모라토’로 표기되어 있으나 시공사판에선 ‘하지 무라드’라고 쓰여있다. 이렇게 등장인물의 이름도 판본에 따라 구분하기 힘든 이름이나 장소, 물건, 고유명사기 나오기 때문에 같이 읽는 것이 좋다고 말한 것이다. 대표적으로 열린책들에선 ‘이달고’라는 고유명사로 표기된 것이 시공사에선 ‘시골귀족’이라고 의역된 점이 그렇다. 마찬가지로 열린책들에선 여관 시설을 가리켜 ‘객줏집’으로, 시공사에선 ‘주막’으로 번역했다. 또 중간에 나오는 악역(?) 세력 중 하나의 경우 열린책들판에선 ‘성스러운 형제단’으로, 시공사판에선 ‘종교경찰’로 번역했다는 점도 흥미롭다. 이렇게 서로 다른 번역본을 비교해가며 읽으면 전체적인 이야기 흐름도 더 깊이 이해할 수 있어 복습하는데도 도움이 될 수 있다.

일단 줄거리를 간단하게 소개하자면, 우리가 아는 그 유명한 풍차 이야기는 극 초반에 해당된다. 그 이전부터 돈키호테 혼자서 모험을 시작하다 실패(?)하여 고향으로 다시 되돌아오다 충실한(?) 종자가 될 산초 판사를 고용(?)하여 다시 뛰쳐나가 모험을 시작하는 것이 초반 줄거리다.

전체적으로 돈키호테는 모든 사건과 분위기를 매우 진지하게 접근하여 행동하고 그 엉뚱한 행동으로 ‘대형사고’가 벌어져 주변인들이 피해를 입는 상황으로 전개 되거나 본의 아니게 재밌는 상황이 연출되어 다른 인물이 겪고 있던 갈등이이 해결되는 구조가 반복되는 형식이다.

일단 충격적이게도 우리의 돈키호테는 ‘기사’가 아니다. 기사인 척 하는 이달고(히달고라고도 알려진, 에스파냐에만 있던 일종의 ‘시골귀족’ 직위다. 이들은 낭만을 찾아 모험을 떠나는 계층이었다)이며 본명은 ‘키하나’ 혹은 ‘케사다’로 불리는 사람이다. 작중에서 조카딸이 그를 가리켜 ‘키하나 삼촌’이라 부른다. 기사 서품식도 허름한 여관에서 주인과 창녀들을 각각 성주와 공주님으로 착각하여 대충 수여받은 것을 가지고 돈키호테는 자신이 기사가 된 것이라고 믿은 것이다! 아니 처음부터 어떻게 보면 제대로 미친 정신상태인 것이, 주막을 진지하게 거대한 성채로 착각하고 주인과 마부들이 그를 골려주려고 밤새도록 불침번을 세우게 했음에도 돈키호테는 이를 당연하고도 즐겁게 받아들이며 경계를 섰고 오히려 그로 인해 따끔한 맛을 본 마부들을 보고 질린 주인이 돈키호테가 진짜로 미쳤음을 알고 경악하여 빨리 그를 내보내려고 기사 수여식을 단행한 것인데... 이 외에도 풍차를 거인으로 오인해 돌격하거나 두 무리의 양떼들을 두 군대의 전쟁터로 오인하여 돌격 한 점, 난폭한 양치기들을 도적떼로 여겨서 산초와 함께 무리하게 싸우다 두들겨 맞고, 중반부터 후반까지 주 무대가 될 다른 주막집의 포도주 창고를 거인 소굴로 오해하여 다 부셔대는 등... 온갖 미친 행동을 일삼는다. 그러면서도 ‘편력기사(기사소설에서 언급되는 떠돌이 기사들을 말함)는 어떤 돈을 내지 않는다’는 신념으로 비용을 지불하지 않으려는 고집도 있고 말이다! 웃긴 건 돈키호테의 종자인 산초 판사는 어떻게 보면 상황파악과 현실을 직시하는 사람이면서도 역시 돈키호테 못지않게 순진하면서도 멍청한 면이 있다는 점이다. 자신을 어떤 섬의 총독으로 만들어주겠다는 돈키호테의 말을 진심으로 믿고 있고 무모한 공격을 감행한 돈키호테를 못마땅해 하면서도 ‘기왕에 이리된 거 전리품이라도 챙기자!’하며 돈키호테가 공격한 대상의 물건을 약탈하다 오히려 혼쭐이 나는 장면을 보면서 바보 콤비의 활약을 실컷 볼 수 있었다. 어쩌면 돈키호테와 산초는 ‘두 사람의 바보 같은 행동으로 일어나는 코미디극’의 원조라고 볼 수 있다. 각각 홀쭉이 키다리와 뚱보 땅딸이 캐릭터이기도 하고.

한편으론 두 사람의 체력과 지구력이 엄청나다는 점도 느꼈다. 돈키호테는 며칠을 자지 않고 먹지 않고도 오직 둘시네아 공주(실은 옆 마을에 사는 시골처녀를 돈키호테가 멋대로 상상한 것)만 떠올리며 버티는 돈키호테 영감의 무시무시한 체력과 그렇게 두들겨 맞고 쓰러져도 다음 장에서 멀쩡하게 돌아다니는 모습으로 보아 현대의 인터넷상에서 무적의 캐릭터라고 칭송받는 <톰과 제리>의 ‘톰’이나 <아기공룡 둘리>의 ‘고길동’을 보는 기분도 들었다. 정말 상상만 해도 토악질이 나올 것 같은 꿀꿀이죽을 보약이라고 만들어 마시곤 토를 한 것을 가지고 마법에서 치료됐다고 우겨대는 돈키호테의 고집이나 그걸 그대로 따라 해서 똑같이 토를 하는 산초도 그렇고 어떻게 400년 전 소설에서 이런 장면이 나올 수 있나 경이로울 정도다.

문장 곳곳에서 위트가 넘치기도 한 점이 ‘산초는 너무 참을 수 없어서 주인 몰래 살짝 엉덩이를 들고 바지를 내려서 볼 일을 보는데 성공했다. 하지만 그의 주인은 코를 쥐어 잡으며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깨달았다’라는 묘사나 ‘돈키호테가 좀 더 힘을 주어서 창을 내리쳤다면 더 이상 산초가 그로부터 봉급을 받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라는 식의 설명은 배꼽을 잡지 않을 수가 없다! 또한 초반에 돈키호테가 다쳐서 마을로 돌아왔을 때 그가 기사소설을 너무 많이 읽어서 미쳐버렸음을 알고 돈키호테의 오랜 친구인 가톨릭 사제인 페로 페레스(통칭 ‘신부’)와 이발사 니콜라스(통칭 ‘이발사’)가 돈키호테의 조카딸과 가정부와 함께 기사소설들을 처분하는 과정을 ‘엄숙하고도 멋진 검열 = 어마어마하고도 즐거운 종교재판’ 따위의 제목으로 붙인 점에서 작가인 세르반테스의 센스를 느낄 수 있다.

하지만 놀라운 점은 돈키호테는 분명 미쳤고 그의 무모한 행동으로 어처구니없는 사건이 발생하였지만 한편으론 그 모험의 시작이 또 다른 사건을 불러내고 그로 인해 고민과 절망에 빠진 사람들이 도움을 받고 행복해지는 결과가 왔다는 점이다. 또 어떨 때는 정말 같은 사람이 맞는지 느껴질 정도로 우아하고 지적인 말을 조리 있게 읊어 사건을 해결하는 돈키호테를 볼 수 있다. 대표적으로 스스로 지적이고 자주적인 인생을 살기 위해 평생 동정인 목동으로 살기로 결심한 마르셀라라는 아가씨를 변호하여 그를 모함하는 마을 청년들에게 일갈하거나 중반의 무대가 되는 주막집에서 많은 사람들을 향해 군인과 학자의 차이에 대해 설명하는 부분 그리고 후반부에 ‘교단 회원(열린책들판 번역, 시공사판에선 교회법 신부로 표기)’이라는 사람과 나눈 열렬한 논쟁에서 보면 돈키호테는 단순히 망상에 빠진 정신병자가 아니라 이상주의를 향해 끊임없이 도전하는 사람으로도 보였다.

일단, 돈키호테에 의해 명백히 피해를 받은 사람도 있긴 있다. 일단 그의 망상을 보고 절망한 조카딸과 가정부가 첫 번째요. 초반에 매를 맞다가 돈키호테가 구해준 소년(안타깝게도 돈키호테가 농부의 보상을 끝까지 봐야했는데 바로 가버리는 바람에 소년은 다시 두들겨 맞음) 그리고 돈키호테에게 공격을 받아 물건을 빼앗긴 얼치기 대학생이나 상인무리의 하인, 옆 마을의 이발사 등은 돈키호테에 의해 큰 상처를 받은 게 확실하다. 이중 중후반 무대를 장식할 여관의 주인은 돈키호테에게 받은 피해가 상당한데 투숙비와 식사비는 물론이고 편력기사의 법칙 운운하며 돈을 안내고 도망치려는 투숙객들에게 두들겨 맞고 있음에도 도움을 받지 못한 점, 포도주 창고가 박살난 점 등... 엄청난 피해를 받았으나 결국 더 많은 보상으로 돌려받았기에 예외로 두고 싶다. 이유는 아래와 같다.

돈키호테의 무모한 모험을 어떻게든 중단시키려고 그를 뒤따라온 신부와 이발사(실은 돈키호테가 ‘자신의 사랑하는 여인을 빼앗겨 미쳐버린 청년 카르데니오’에게 두들겨 맞은 후, ‘난 왜 맨날 이럴까?’하는 상심으로 옷을 벗고 좌절에 빠진 채, 둘시네아 공주를 기다린다는 핑계로 산초를 마을로 돌려보낸 것, 이유는 둘시네아의 편지를 받겠다는 이유 하나...)가 ‘우연히’ 만난 아름다운 미청년...인 줄 알았는데 실은 남장한 여자였던 ‘도로테아’의 사연을 듣게 되고 하필 그 과정에서 도로테아와 카르데니오가 서로 아는 사이라는 점을 깨닫고...

(실은 카르데니오는 ‘루스신다’라는 아가씨와 사랑에 빠졌는데 이 루스신다를 자신의 상관이자 절친인 ‘돈 페르난도’라는 귀족이 가로채고 도로테아는 그 돈 페르난도와 결혼하기로 약속한 사이였다. 둘이서 서로의 운명을 깨닫고 함께 슬퍼했다) 이로 인해 카르데니오는 정신을 차리게 된다. 또 도로테아는 자신의 잘못된 인생을 바로잡기 위해 돈키호테를 돕는다는 취지로 ‘미코미코나 공주’라는 미지의 귀부인으로 연기하였고(도로테아는 기사소설을 많이 읽은 요즘말로 여덕후 혹은 동인녀인 셈이다!) 폐인이 되기 직전의 돈키호테를 구해내는데 성공한다.

중간에 한번 돈키호테와 산초가 난동을 피웠던 여관으로 도착했을 때, 또 ‘우연히’ 루스신다를 데리고 멀리 도망치려는 돈 페르난도를 돈키호테 일행이 맞이하게 되며... 살벌하게 이어질 것 같은 이야기는 의외로 싱겁게 돈 페르난도가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는 것으로 마무리 되고 그렇게도 돈 페르난도를 미워했던 시골소녀 도로테아는 돈 페르난도의 다리를 붙잡고 ‘제발 저를 버리지 말아줘요’라고 애원하는 애절한 모습을 보여준다. 돈키호테의 이상한 민폐로 시작된 엉뚱한 모험이 두 쌍의 커플을 화해시키고 이후 여관을 찾아오는 사람들과도 인연을 맺게 해주는 계기가 된 것이다! 물론 여기엔 신부와 이발사 그리고 도로테아의 명연기(?)가 큰 역할을 담당했다.

재밌는 건 돈키호테엔 돈키호테 일행과 상관없는 액자식 구성 이야기가 꽤 많이 들어있다는 점이다. 우선 위에서 말한 카르데니오와 도로테아가 겪은 비극과 이어서 루스신다(루신다)와 돈 페르난도의 입장 그리고 여관 주인이 가지고 있던 수수께끼의 소설(유쾌하고 웃긴 돈키호테 안에서 전혀 분위기가 다른, 어쩌면 매우 불쾌하고 어두운 내용인)을 신부가 읽어나가는 식으로 전개되는 부분, 여관집으로 계속 사람들이 찾아와 그들의 이야기를 듣는 부분 등이 있다. 카르데니오-루스신다, 돈 페르난도-도로테아 커플에 이어 무어인(당시 에스파냐인들이 무슬림 정복자들을 부르던 통칭)에게 노예로 잡혀있다 풀려난 군인과 소라이다라는 그리스도교로 개종한 무슬림 아가씨의 이야기 그리고 곧바로 현명한 재판관과 그 어린 딸이 찾아와 이야기를 전해듣는 방식이 계속 이어진다.

공교롭게도 ‘우연히’ 알고 보니까, 군인과 재판관은 서로 형제관계였다! 또 재판관의 딸을 사모했던 기사의 아들이라는 도련님도 또 여관까지 몰래 찾아왔는데 처음엔 그 도련님을 쫒아온 하인들 때문에 다툼이 있었다가 돈 페르난도와 신부가 개입하여 상황을 종결시키고 서로가 서로를 돕는 모습을 보여주며 훈훈하게 마무리 짓는다. 여관 주인은 중간에 두들겨 맞고 많은 곤혹을 치루지만 신부와 돈 페르난도가 배로 배상해주겠다는 약속으로 좋아 죽는 모습을 보며 많은 생각을 하게 됐다.

한편, 이야기 안에선 각 인물들의 대사와 행동을 통해 웃을 수밖에 없는 슬랩스틱 코미디스러운 상황을 상상할 수 있었는데 눈치가 빠르고 현실적으로 행동하지만 그만큼 멍청하고 글도 모르는 판초의 대사인 “주인님, 분명 마법사와 마녀의 행동이 분명한데 제가 이불로 헹가래 쳐진 것은 마법이 아니고 그짓을 행한 자들은 저와 같은 사람이었어요!“ 같은 구절이나 ”흑흑, 미코미코나 공주가 실은 도로테아라는 평범한 시골소녀라니! 그럼 제가 받을 섬은 어떻게 되는 건가요!“라고 슬퍼하는 장면과 남들은 카르데니오-돈 페르난도의 화해를 보고 감동해서 우는데 산초 혼자서는 ‘자신의 모험이 실패해서 출세를 못할까봐 - 돈키호테가 제시한 약속을 진심으로 믿고 있는 이유’로 진심으로 슬퍼하는 점 등이다. 또 카르데니오가 자신의 과거를 한탄하며 열심히 혼자서 말하고 있는데 ‘기사소설’이라는 단어 하나 때문에 괜히 돈키호테가 끼어들어서 ‘아마디스 데 가울라를 권하셨어야죠!’라는 말을 꺼내 들어서 매를 자초하는 장면을 보면 나도 모르게 한숨이 내쉬어진다! 한편, 신부와 이발사가 돈키호테의 서재를 정리할 때 세르반테스의 다른 작품들도 화형을 당하는 묘사를 볼 때 작가의 소소한 자책도 엿볼 수 있어 빵 터지지 않을 수가 없었다.

 

수록된 삽화는 저 유명한 귀스타브 도레라는 화가인데, 삽화만 보면 매우 심각하고 진지한 장면이 연속으로 일어난 것 같지만 실제로는 전혀 진지하지 않고 오히려 웃기고 황당하며 어이가 없는 상황의 연속이다. 따라서 삽화만 보고 이야기를 읽지 않는다면 돈키호테를 전혀 이해할 수 없기도 하다! 예를 들어 후반에 수록된 삽화만 보면 마치 돈키호테가 종교재판에 회부되어 감옥으로 들어갈 것 같은 분위기로 보이지만 사실은, 여관 사람들이 합심해서 돈키호테를 고향으로 돌려보내기 위해 가짜 마법사 집단으로 변장하여 돈키호테를 강제로 마법의 힘으로 구속시키는 연극을 벌인 것이었다. 이렇듯 진지하게 표현된 삽화와 괴리된 우스꽝스러운 이야기의 실체는 완독한 독자에게 쓴 웃음을 전해준다!

이 돈키호테라는 작품이 어떤 의미를 주는 작품인지는 앞으로도 다양한 해석이 나올 수밖에 없다. 흔히 말하는, 기사 계급을 풍자하는 소설일 수도 있고 당시 에스파냐의 시대 상황을 비꼬기 위해 의도적으로 연출 된 것일 수도 있다. 혹은 정말 의미가 없을 수도 있다. 세르반테스가 심심해서 혹은 자신의 인생을 위로하거나 돈을 벌기 위해 재미있는 소설을 구상한 것일 수도 있다. 한편으론 기상천외하고 우스꽝스러운 장면이 가득함에도 이를 일일이 확인하여 결국엔 출판 허가를 낸 당시의 에스파냐라는 나라가 놀랍기도 하다. 보통 당시의 에스파냐는 종교적으로 경직된 나라라고 알려져 있으니까.

각 등장인물이 처한 상황에 따라 입장을 달리 말하다가 곤경에 처하는 모습도 흥미롭다. 예를 들어 중후반의 여관 주인은 돈키호테를 못 마땅해 하면서도 그와 비슷하게 기사소설을 비판하는 신부를 향해 역으로 그런 소설들을 비하하지 말라고 일갈하는 등 의외의 모습을 보여준다. 후반에 돈키호테와 토론하게 되는 교단 회원도 처음엔 ‘말도 안 되는 판타지 소설에 집착하지 말고 성경을 좀 더 읽어 보시죠?’라고 훈계 하다가 돈키호테가 ‘그럼 실제 존재했던 에스파냐의 레콩키스타 영웅들의 이야기는 기사소설과 다를 게 뭐가 있어요?’라고 반문하자 꼬리를 내리는 등 입체적이고 인간적인 면모가 보인다. 암울하고 무시무시하다고 알려진 근세 에스파냐에서 나온 소설답지 않게 이 책의 등장인물 중에 진심으로 악의적인 인물은 거의 없다. 심지어 무어인 아가씨 소라이다(나중엔 마리아로 개명)의 아버지조차 딸을 저주하다가 서럽게 울면서 아비를 용서해달라고, 다시 돌아와 달라고 애원하며 절규하는 장면을 볼 때, 안타까운 마음이 들기도 했지만 그렇다고 군인과 소라이다가 겪은 고통을 무시할 수도 없고 각자가 처한 상황에 대해 고민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이렇듯 돈키호테는 단순히 바보 같은 모험 이야기가 아니었다. 개인적인 생각을 말하자면, ‘한 개인의 말도 안 되는 망상으로 시작된 모험조차 다른 사람들에게 희망과 새로운 기회를 안겨줄 수도 있다’는 점에서 이 세상에 무의미한 행동과 말은 없으며 시작이 있으면 끝이 있고 그로 인해 발생한 긍정적인 힘은 엄청난 파급효과를 낸다고 말이다. 이는 갈수록 힘들어질 것이라고 좌절하는 21세기 사람들에게 인생을 재밌고 보람되게 살 수 있는 실마리를 제공할 수 있을 것이다. 무언가 행동을 한다면, 그것이 설령 실패하거나 무모한 것이라 해도 함부로 깎아내리지 말고 최선을 다해 진행하다보면 수많은 사람과 사건을 만나는 기회의 연속이 내게 다가온다는 식으로 해석할 수 있겠다.

미겔 데 세르반테스 사아베드라는 무려 세계사를 바꾼 전투인 ‘레판토 해전’에 참전하신 역전의 용사였다. 이 전투에서 그는 한쪽 팔을 다쳐 평생 불구가 되었지만 오히려 그것을 자랑스럽게 생각했다. 그 후에도 열심히 군인으로 살면서 이슬람 해적들에게 납치당한 그리스도인들을 구하다가 역으로 자신이 붙잡혀 노예로서 5년 넘게 노역을 당하기도 했다. 기적적으로 풀려나 에스파냐로 돌아올 수 있었고 후에 돈키호테라는 걸작을 남길 수 있었다. 영국에 셰익스피어가 있다면 에스파냐-스페인에는 세르반테스가 있겠다. 공교롭게도 두 사람은 같은 해, 같은 날에 사망했다! 바로 1616년 4월 23일에 말이다. 도시전설로는 셰익스피어와 세르반테스가 서로를 알고 있었다는 야사가 전해진다.

덧붙여서 돈키호테를 완역하신 안영옥과 박철 두 분은 모두 돈키호테를 주제로 한 유튜브 영상을 업로드했다. 관심이 있으신 분들은 찾아서 시청하면 또 다른 학습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에스파냐-스페인의 자존심 돈키호테는 1권이 끝이 아니다! 무려 10년 후에 후속편이 발간되어 2권으로 사람들에게 알려졌는데 그 사이에 가짜 후속편으로 곤혹을 치룬 것을 세르반테스 본인이 그것을 맹비난하는 장면이 2권에 수록되어있다고 한다. 2권의 소감도 나중에 쓸 예정!

 

보너스 : 성전환한 돈키호테와 산초를 그려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