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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 - 나만의 돋보기/이벤트용 서평

[공모전용] 헐버트 박사와 현대 한글 탄생의 연관성 정리.txt

*이 글은 헐버트박사기념사업회에 제출한 문서로, 나름대로의 생각을 정리한 글입니다.

 

 

 

 

대왕이시여, 다시 깨어나시옵소서!”

부제 : 한국 역사를 바꾼 숨겨진 선각자, 그가 없었으면 우린 어찌 되었으리!

 

 

 

 

*본 내용은 2016년에 출간된 헐버트 박사의 논문과 신문기고문을 정리한 책인 헐버트, 조선의 혼을 깨우다2020년에 출간된 헐버트의 꿈, 조선은 피어나리!그리고 20218월에 출간된 말 위에서 본 조선2021년 여름부터 가을까지 진행된 배재학당역사박물관 측에서 기획한 정동에서 살았던 외국인들중 아펜젤러와 헐버트 박사에 대한 강연 기록을 종합적으로 분석하여 개인적인 생각과 앞으로의 세계정세에 대한 희망사항을 정리한 글이며 저뿐만 아니라 사회 구성원 모두가 새롭게 알았으면 하는 마음을 담아 작성하였음을 밝힙니다.

 

 

“ 헐버트 박사의 여정을 찾을 수 있었던 소중한 책들입니다 “

 

 

구한말부터 일제강점기에 이르기까지 조선왕조-대한제국을 거쳐 간 외국인 교육자-독립운동가는 많았지만 헐버트 박사만큼 대단한 사람은 없다고 단언합니다. 아펜젤러, 베델, 스코필드, 셔우드 홀, 제임스 게일, 알렌, 묄렌도르프, 사바틴, 이승만 전 대통령의 영부인인 프란체스카 여사에 이르기까지 한국을 사랑한 외국인은 많았지만 호머 헐버트 박사만큼 다른 한국인 독립운동가와 교육자들에게 큰 영향을 끼친 인물은 유일무의하다고 장담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물론 다른 운동가분들이 헐버트 박사보다 못하다는 것은 절대 아님을 밝힙니다! 그러나, 이번 시간의 핵심은 한글그 자체를 다루므로 여기선 헐버트 박사의 행동이 아니었으면 이후 한국 역사와 전 세계 인류 역사가 크게 달라졌을 거라고 단언할 수 있을 정도의 이야기를 서술하고자 합니다.

 

인류 역사상 자국민 백성을 위해 스스로 문자를 만들어낸 국가는 손에 꼽을 만큼 적습니다. 그 중 하나가 세종대왕이라는 사실은 우리 스스로 자긍심을 갖추기 충분한 역사적 사실입니다. 이런 한글에 대해 단순히 대단한 글자임을 칭송하는 것을 넘어서 한글의 기원에 대한 고찰과 응용방법과 이를 통한 국민교육의 방법까지 고민했던 사람이 바로 호머 헐버트였습니다.

현재 대한민국에서 살아가는 저를 포함한 모든 한국인들은 헐버트 박사에게 큰 빚을 지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라고 봅니다.

 

참고로, 지금부터 서술할 내용은 결코 조선 시대를 폄하하고자 하는 것이 아님을 밝힙니다! 허나 과거의 아쉬운 상황과 실수를 만회하고 이제부터 세계에 공헌하는 올바른 자유국가의 모범시민으로서의 마음을 가지기 위해 헐버트 박사의 자취를 기억하면서 사람들에게 새로운 발상을 전달해주기 위해 글을 이어나가겠습니다.

 

일단, 조선 왕조는 성리학 국가였습니다. 성리학은 고려 시대 후기에 중국에서 건너온 사상이었죠. 당시로선 도탄에 빠진 백성들을 구하기 위해 궁여지책으로 가져온 새로운 통치 이념이었지만 현대 세계시민이 보기에 굉장히 한계가 많은 사상으로 보이는 것도 현실이라 볼 수 있습니다.

 

14세기 말, 몽골제국을 몰아내고 새롭게 건국된 중국 명나라의 거대함을 두려워하면서도 500년 전 당시엔 여전히 세계 최고의 문명국가였던 중국을 추앙했던 분위기가 만연한 상태로 건국된 조선 왕조 안에서, 그 어떤 조선의 지식인들도 세종대왕이 만든 한글-훈민정음 그 자체에 대해 다시 한 번 뒤돌아서 연구하고 새롭게 재구성하려는 생각을 하지도 못했다고 생각합니다. 일단 옛 시대 임금이 만든 물건에 함부로 손을 대기 힘든 마음도 있을 것이며 무엇보다 중국 문명에 대한 동경 즉 모화사상이 너무나도 강력하게 선비들에게 깃들어 있었기에 한글의 중요성은 그들에게 그렇게 크지 않은 이유도 있을 것입니다. 그런 상황에 홀연히 조선 땅에 발을 디딘 미국인 학자 헐버트 박사께서 이것을 재조명하기 시작한 것은 하늘이 내린 기회이자 축복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비록 지금은 굉장히 구시대적인 학설인, 허나 당시로서는 가장 최신에 획기적인 가설이었던 티베트 문자와 몽골 파스파 문자 그리고 인도의 드라비다 어족과 대만 토착어족의 연관성까지 논문에 기고했던 헐버트 박사의 열정은 100년 후의 시각으로 봐도 대단합니다. 자신의 형은 아무도 찾지 않는 오지라는 이유로 조선 선교를 거절했으나 질병이나 정치적 혼란 때문에 두려움에 떨어서 아무도 가고 싶지 않았던 조선 땅으로 오히려 용기 있게 들어가셨던 헐버트 박사의 한국사랑은 그가 저술한 여러 논문과 신문 기고에서도 확인 할 수 있었습니다. 한글, 한국어는 물론이고 한문과 중국어에도 능통했던 헐버트 박사는 조선 영조 때 출간된 문헌비고(동국문헌비고, 증보문헌비고가 있음)’를 통해 훈민정음의 기원에 대해 서술하고 조선 중기의 학자인 이수광의 훈민정음의 티베트 문자 기원설에 대해 반박까지 하는 등 훈민정음 해례본1940년에 발견되기 전까지 헐버트 박사는 그 당시 조선 땅에 남겨진 사료들을 총동원(예를 들면 현재 사학계에서 신돈은 비운의 개혁가이자 고려의 천민들을 생각하는 운동가로 재평가 받고 있으나 100년 전엔 고려 말기를 뒤흔든 사악한 요승으로만 평가되던 시절이어서 헐버트 역시 신돈을 매우 부정적인 인물로 생각했음. 티베트 문자 기원설을 비판한 이유가 바로 불교를 배척하며 건국된 조선 왕조를 변호하면서 서술하신 걸로 생각됨)하여 서술한 논문에서 한글 그 자체에 대한 애정과 연구를 아끼지 않았다고 보입니다.

 

헐버트 박사는 한글의 발음과 쓰기를 4일 만에 터득하고 이보다 더 편한 글자가 없다고 단언하셨는데 이는 헐버트 본인의 능력이 대단한 것도 있겠지만 그만큼 세종대왕의 한글이 과학적이고 지식에 접근하기 힘들었던 하층민을 위해 만들어진 배우기 쉬운 인공문자라는 것을 반증할 수 있겠습니다. 한편으론 헐버트 박사의 발자취를 연구하신 김동진 회장님의 여러 강의 자료와 발언을 들으면서 과거의 성현들로부터 어느 정도 섭섭한 마음을 지울 수 없는 느낌도 들었습니다. 돌이켜보면 조선 왕조 내내 국가에서 발간된 공인된 도서 혹은 기록물은 전부 한자로 쓰여 있고 극히 일부의 저서, 포교문에 훈민정음이 함께 게시(예를 들면 1592413일에 언문으로 백성들에게 왜군 토벌 교서를 내린 선조의 예)되었기에 한글은 한문보다 후순위로 밀려있음이라는 기분을 지울 수 없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물론 저도 세간에 떠도는 도시전설인 훈민정음 창제를 반대한 선비들이 많았다라던가 조선 선비들은 한글을 천시했다라는 단순한 속설에는 반대하는 마음입니다. 가장 유명한 최만리의 한글반대 상소문도 형식적인 우려를 전한 것에 불과했고 수년 간 동고동락한 당시의 집현전 학자들의 노고를 서로 존중한 상황에서 어떻게 임금의 프로젝트를 거역할 수 있을까요? 게다가 수많은 한글로 쓰인 고전소설과 선비 식자층들이 서로에게 보낸 서신, 정조 임금도 한글로 편지를 써서 신하들과 소통한 자료가 남아있어 세종대왕의 뜻은 후대에 이어지고 있었습니다. 허나 이것으로 끝내기엔 아쉬운 부분은 역시 큽니다. 관점을 다르게 바꿔보면 공식적인 국가의 제1언어로, 백성들에게 널리 보급하여 의사소통과 문맹을 퇴치하는데 앞장서게 하는 교육글자로서의 한글로 성장하진 못했다고 보였기 때문이었어요.

 

1891년에 간행된 사민필지는 구한 말 근대교육의 선구자였던 아펜젤러 목사와 함께 헐버트 박사와 그의 조선인 제자들이 함께 참여하여 제작한 새롭게 태어난 근대국가 대한제국이 야심차게 준비한 근대국민교육을 위해 만들어진 최초의 교과서 그 자체였습니다. 고종 황제가 직접 참관한 엄격한 시험을 통해 선발된 엘리트로 성장할 조선인 인재들이 들어가는 근대식 학교였던 육영공원, 배재학당 그리고 이화학당에 보급되어 교과서로서의 역할을 다하였습니다. 이 교과서의 수혜를 받은 사람은 헐버트 박사의 제자이자 근현대사에서 절대 빼놓을 수 없는 두 사람인, 주시경 선생과 이승만 전 대통령이었습니다.

 

 

이 사민필지의 제목 자체가 선비와 일반 백성들이 알아야할 필수적인 지식이란 뜻이었고 조선 사람들이 쉽게 알 수 있도록 도량형 단위들을 리(거리), (높이), (곡물의 양) 등으로 표기했고 당시 조선 땅에 있는 최신 목판 기술로 만들어진 지도를 총동원하여 3년 만에 큰 비용을 들여 만들었던 이 책은 조선 사람들에게 당시의 세계 상황을 알려주기 위해 만들어진 소중한 근대문화유산이었습니다. 그런 사민필지의 앞부분에서 헐버트 박사는 탄식합니다. ‘어찌 세종대왕이 만드신 이 위대한 한글을 조선 사람들이 제대로 활용하지 못했던 것인가!’라고. 뭔가 기괴한 느낌이 들었습니다. 분명 한글로 쓰인 편지를 쓰는 식자층들도 있었는데 한글 사용이 저조했었다니 말입니다. 대신 백성들이 자신의 노고를 언문으로 쓴 상소문을 관가에 올린 기록은 숙종 시대였던 169943, 1701425, 영조 시대였던 174325일에 남아있지만 그렇게 많은 사례로 보이진 않았습니다.

 

이의 경우 저는 이렇게 이해했습니다. 한글 자체를 언문이나 암클(여성과 아이가 주로 쓰는 문자라며 불린, 한글에 대한 멸칭)이라 불린 훈민정음 자체를 냅두되 국왕과 선비들은 한글을 이용하되 한문 다음으로 익히는 배우면 더 유용하고 안 배워도 크게 문제없는 제2외국어로 한글을 취급하고 있었다는 식으로 말입니다. 일단 언문과 암클에 대한 이야기는 확실한 기록이 아직 없기에 세간에 떠도는 야사나 도시전설로 취급받지만 헐버트 박사의 여러 기고문과 논문에서 언급되는 탄식과 이후 한글학자들의 비슷한 언급을 볼 때 헐버트 박사가 조선 땅을 밟지 않았으면 우린 여전히 한글의 중요성에 대해 더 먼 삶을 살았을지도 모른다는 섬뜩한 생각을 가졌습니다.

 

일단 세종께서 반포한 훈민정음은 과학적이고 대단한 글자이지만 현대 한국인들이 보기엔 여전히 읽기 힘든 고대의 상형 문자로 보입니다. 현재 우리가 편하게 한글을 이용 할 수 있었던 비결은 청나라와 조선 땅을 밟았던 선교사들의 노력과 대한제국 시기 인재 발굴에 총력을 기울인 헐버트 박사와 아펜젤러 목사 그리고 제자로 거듭난 주시경 선생과 이후 한글학자들의 노력이 수십 년간 점진적인 노력을 통해 현대 한글로 발전할 수 있었던 거였습니다. 현대 한국어의 역사는 길어도 100~120년 정도 밖에 되지 않았다는 것인데 그 이전에는 시대를 앞선 사람들이라고 칭송받던 실학자들조차 감히 한글에 대한 새로운 접근을 시도하지 않은 점에서 아쉬움이 남습니다. ‘암암리에 사용되는 글자를 넘어 국가 공인 교육 언어로 철저하게 보급되어야 할 필요성을 설파한 것은 헐버트 박사가 최초라 봐도 무방합니다. 만약 이것이 사실이 아니라면 어째서 사민필지 앞부분에서 헐버트 박사가 조선의 지식인들이 한글을 천시하고 있었다며 한탄을 했을까요? 물론 헐버트 본인이 완벽하지 않아서 당시엔 발견되지 않은 기록들을 보지 못한 것도 있겠습니다.

 

허나, 석연치 않은 구석도 있습니다. 바로 신미양요의 결과물인 조미수호통상조약을 보면 미국에 대한 기대와 실망에 대한 진실성은 둘째 치고, 국가와 국가 간의 통상 조약임에도 불구하고 조선 왕조 측의 글은 전부 한문으로 기록되어 있었습니다. 훈민정음의 흔적은 찾아 볼 수 없었죠. 국가가 공인한 중요한 자리에선 한문이 항상 한글보다 우선이었다는 사실을 증명하는 자료일 수 있어요. 물론 이것이 나쁘다고만 매도할 것은 아닐 테지만, 헐버트 박사를 연구하시는 후대 학자 분들이 개탄해하는 이야깃거리기도 합니다. 반강제적으로 시작해야했던 갑오개혁을 통해서야 근대교육이 시작되고 사민필지 보급을 통해 한글의 중요성을 깨닫기 전만해도 한글을 한문보다 더 강조하는 움직임은 없었다는 것에 주목해야 할 것입니다.

 

 

 

한국의 조미통상수호조약 (1882) 중 일부

(출처 : http://pub.chosun.com/client/article/viw.asp?cate=c03&nNewsNumb=20160419946)

 

일본의 가나가와 조약(미일화친조약, 1854)’ 중 일부

(출처 : https://ko.wikipedia.org/wiki/%EA%B0%80%EB%82%98%EA%B0%80%EC%99%80_%EC%A1%B0%EC%95%BD)

 

일본의 안세이 5개국 조약 (1858)’ 중의 일부

(출처 : http://www.archives.go.jp/exhibition/digital/bakumatsu/contents/20.html)

 

태국의 1차 태-미 통상 수호 조약(1833)’ 중의 일부

(출처 : https://thaiembdc.org/2016/03/20/today-back-in-183-years-ago/)

 

 

 

혹시나 다른 한자 문화권 국가들도 비슷하지 않았을까?’라는 생각에 열심히 다른 나라들의 사례를 가져왔습니다. 일본의 경우 조선보다 더 앞서 무시무시한 개방을 맞이하면서 2차례의 수호 조약을 쓰게 됐는데 최초의 조약문에는 한문만 쓰여 있었으나 훗날 가나와 한문이 섞인 조약문을 다시 만들게 됐다고 들었습니다. 태국의 경우에는 에티오피아와 함께 19세기 제국주의 시대를 이겨낸 국가 중 하나며 자신들만의 특이한 문자가 있었기에 당당하게 조약문엔 태국만의 언어만 쓰여 있었습니다. (아쉽게도 미얀마와 베트남의 통상 조약문은 인터넷에서도 찾을 수 없었습니다) 개인적으론 조선은 영락없는 주권 국가였으나 지식인들이 오랫동안 유지되어 온 성리학적 사회 분위기로 인해 중국 문명을 동경하는 모화사상에 빠져 있어 한글 자체를 업신여기진 않았으나 그렇게 중요하게 여기지도 않았을까하는 생각으로 빠져듭니다.

 

무엇보다 1895, 조선 왕조가 대한제국으로 승격된 이후 함께 개편된 학부라는 기관에선 굳세고 책임감 있는 관료의 상징이었던 김홍집의 명으로 한글로 편찬된 사민필지를 역으로 한문본으로 재번역하여 출간했다는 것입니다. 당시 대한제국 정부는 언문이나 암클로 불리던 한글을 국문으로 호칭하면서 공식문서에서 한문을 폐지하는 개혁 활동을 열심히 하였으나 김홍집을 비롯한 정부 관료 상당수는 여전히 한문을 고집하는 세계관에 머물러 있었다는 생각을 거부할 수 없었습니다. 이에 대한 자성의 목소리는 주시경의 후배였던, 독립운동가 겸 한글학자이신 최현배(1894~1970) 선생의 저서인 고친 한글갈(1961년 출간)’에서 한글로 출간된 사민필지를 다시 한문본으로 재출간하는 건 시대를 역행하는 짓이다!”라고 안타까운 심정을 토로한 것을 봐도 알 수 있습니다.

 

물론 이는 시대적 한계일 수 있습니다. 오직 중국 문명만이 최고라고 생각하여 한문을 사랑했던 사람들이 많은 현실 때문에 어쩔 수 없이 한글에서 한문으로 재번역(?)한 것 자체로 조선 시대의 지식인들을 매도할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모화사상이 얼마나 조선 지식인들에게 영향을 끼쳤나에 대해 고민해 볼 이야기인 것은 틀림없습니다.

 

이와 별개로 다른 시각으로 워낙 서쪽의 중국이 강대해서 조선 왕조 혼자서 독단적인 행동을 절대 할 수 없었기 때문에 여러 가지 요소가 겹쳐서 생긴 결과로 봐야한다는 의견도 있습니다. 예를 들어 위에서 언급한 조미통상수호조약에서 사용된 국장(국가 공인 도장)이 시대가 변하면서 여러 가지 종류로 변했는데 처음엔 명백히 청나라의 형식상 속국임을 자처하는 도장이 사용되었으나 후에는 엄연히 스스로 움직이는 주권국가임을 나타내는 국장들을 사용하면서 모화사상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한 노력이 조선 조정과 관료들에게 있었다는 것을 잊어선 안 되겠죠? 이제는 시대가 바뀌어 더불어 사는 지구촌 사회가 되었기에 우린 과거의 아쉬운 사례를 뒤로 한 채 더욱 생산적인 시민이 되기 위해 노력해야할 것입니다.

 

확실한 것은 헐버트 박사께선 단순히 조선의 문화유산을 사랑한 것이 아니라 미래를 위해 중국과 일본 사람들을 생각하며 활동했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습니다. 1913년에 작성된 것으로 추정되는 신원 미상의 인물이 헐버트 박사에 대한 기록에 따르면 현대 중국인들도 인정하는 불편하고 쓰기 힘든, 너무나도 익히기 힘든 한문을 대체할 문자를 개발하여 중국에 보급해야할 것을 호소했던 헐버트 박사의 애민정신을 엿볼 수 있습니다. 이 문서에선 중국 스스로 오랜 역사와 문화를 자랑하는 지식인의 천국이니 한글을 발명한 세종대왕의 예처럼 그들도 뛰어난 대체 문자를 만들 수 있을 거라고 칭찬하는 글이 쓰여 있는 것으로 보아 헐버트 박사는 특정 국가는 미워하거나 사랑하는 것이 아닌 사해동포주의가 항상 담겨있던 사람으로 보였습니다. 헐버트의 교육에 대한 열정은 오직 조선만의 것이 아니라 아시아 각국 아니, 세계의 어려운 형편에 처한 시민들을 돕기 위한 고민의 결실이라 볼 수 있습니다.

 

또한 1930년대 초기에 작성된 헐버트의 회고록 일부에선 일본 제국이 한글을 받아들여 자신들의 공식 문자로 채택했으면 얼마나 좋았을까?’라고 한탄하는 기록이 있었습니다. 세계를 상대로 팽창하던 일본을 상대로 마냥 미워하지 않고 어려움에 처한 백성들에게 익히기 쉬운 글자로 한글을 채택해 더욱 문화 시민으로 육성하여 각 나라들이 부강하고도 성숙한 시민의식을 가진 나라로 거듭나길 원했던 그의 마음을 엿볼 수 있었습니다.

 

게다가 헐버트 박사는 단순히 조선의 위정자들을 비판하는 것이 아닌 한문을 라틴어로 비유하고 한글을 영어로 치환하여 영국 역사의 지식인들이 영어가 대중들에게 보급된 이후에도 라틴어를 구사하며 자신들끼리 친목을 다진 것을 비판하는 식으로 비교했다는 점입니다. 헐버트의 눈으로는 서구권의 역사도 마땅히 비판받아야 하는 동등한 기준이 심어져 있었다고 봐야 합니다. 한문에만 매달린 조선의 선비들을 비판하는 것도 식민사학적인 시각이 아니라 과거 유럽의 식자들이 하층민들이 배우기 힘든 라틴어에 매달리면서 자국의 언어에 애정을 갖지 않았으므로 조선 사람들은 이 실수를 답습하지 말아야 합니다.’라는 마음으로 세종대왕의 한글을 바라보았을 것입니다.

 

게다가 헐버트 본인 역시 구한 말의 아쉬운 부분에 대해선 거침없이 속마음을 털어놓기도 했습니다. 1891년에 기재된 일본의 영문판 신문인 재팬 메일에 기고된 1890년 한양에서부터 평양까지의 여행 기록을 담은 이야기(이 내용이 바로 말 위에서 본 조선의 내용)를 읽어보면 참으로 재미있고도 서글픈 분위기가 나오는데 여행을 힘겹게 다니다 깨끗한 물인 줄 알고 마신 물은 알고 보니 위쪽 계곡에서 아낙내들이 빨래한 곳에서 흘러온 물이었음을 깨닫고 나는 이 물가를 소개해 준 관계자를 두들겨 패고 싶었다.’라고 솔직하게 기록한 부분은 인간미가 넘치고 전근대 국가의 전형적인 모습을 보여줍니다. 한편으로 해안가가 척박하고 아무 것도 없다고 조선을 무시하지 마라. 이는 일본 해적들의 약탈로 살기 불편해진 백성들이 내륙으로 들어가 살고 일부러 해안가를 방치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며 일부 정치 진영에서 비판하는 조선의 폐쇄성에 대해 변호하는 모습도 보입니다. 게다가 여행하면서 불편한 점을 호소하면서도 헐버트는 조선의 민심과 문화에 큰 흥미를 보였고 사람들과 진심으로 소통하고 즐거운 날을 보냈기에 더더욱 재치 있는 당대의 익살스러움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무엇보다 헐버트 박사는 일본의 좋은 점을 본받아야 한다는 것을 앞장서서 말하기도 했습니다. 일본을 마냥 미워한 사람이 아니었던 것입니다. 1887뉴어크 데일리 애드버타이저신문에 기고한 미카도(일본의 천황=덴노에 대한 다른 호칭)의 나라, 일본을 통해 조선 못지않게 일본의 문화와 자연환경을 칭송하고 어려움에 처한 일본 시민들의 이야기를 엿볼 수 있었습니다. 육영공원에서 조선인 학생들에게 교육활동을 진행했을 때에도 헐버트는 일본 역시 유교적 사회로 여성의 교육 기회가 적었는데 근대교육을 통해 이를 극복하고 있으니 조선 사람들 역시 여성들에게 교육의 기회를 줘야 할 것이며 일본을 본 받자라고 말했습니다. 그가 처음 조선 땅을 밟았을 때 본 모습은 청나라 관리들의 횡포였음에도 후에 중국 사람들의 교육에 대해 걱정을 했고 일본의 입김이 들어갔다곤 하나 나름 근대화 노력이었던 갑오개혁 이후로 대한제국이 이룩한 수많은 노력 속에서도 일본의 좋은 점을 찾아보자며 모든 나라들을 평등하게 바라보는 시각은 후세 사람들에게 귀감이 되는 사례입니다. 또한 자신의 모국인 미국을 향해서도 어째서 밀약을 통해 조선 사람들의 기대를 저버리는 짓을 할 수 있냐며 당대 미국의 위정자들에 대해 따끔한 비판을 서슴지 않았기에 개인적으로 이 글을 쓴 저는 헐버트 박사가 정말 100년 전 사람이 맞는지에 대한 의문을 가지기도 했습니다. 이러한 생각과 행동은 현대인도 함부로 할 수 없는 용기가 필요하기 때문이었어요.

 

이러한 교육과 계몽 그리고 올바른 시민의식을 심기 위해 노력했던 헐버트 박사가 존재했기에 한글의 어머니인 주시경 선생이 활약할 수 있었고 대한민국 초대 대통령 이승만이 존재할 수 있었던 것이겠습니다. 헐버트 박사가 없었으면 세종대왕에 대한 재평가도 없었을 것이고 주시경과 이승만도 없었을 지도요. 우린 한국 근현대사의 숨겨진 위인에게 큰 빚을 지고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대한민국은 자타가 공인하는 세계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굉장히 강력한 나라가 됐다는 점입니다. 옛 세대들의 피와 땀이 가득한 희생과 지금 이 순간에도 자신의 이익보다 사회의 이익을 위해 고통 받고 있는 사람들 덕에 우린 지금 숨을 쉬고 이 땅을 걸을 수 있다는 사실을 다시 한 번 깨달으면서 나 자신은 사회에 어떻게 공헌을 해야 하는 것에 대한 고민은 물론이고 덧붙이자면, 세계 사람들에게 얼마나 생산적인 사람으로 기억될지 고민하고 조용히 실력을 더 배양해야하는 시기라고 볼 수 있겠습니다.

 

역사에 만약이란 것은 없습니다. 한 순간의 판단 혹은 실수는 미래를 크게 바꿀 수 있다는 나비효과이론에서 알 수 있듯이 누군가의 행동이나 언행은 수많은 사람들의 마음을 바꿀 수 있으며 이는 긍정적일 수도 있으며 부정적일 수 있습니다. 과거에 아쉬운 일이 많았던 사람들에겐 그만큼 미래의 긍정적인 결과를 기대하며 현재의 문제를 꾸준히 개선시키는 노력을 항상 가지고 있으면서 어제의 나보다 더 나은 오늘의 나를 만들어가는 것이 내 주변 사람들을 도우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그러한 생각을 전해준 사람은 독립 운동가이면서 위대한 교육자이신 호머 헐버트 박사님께 다시 한 번 감사의 마음을 하늘을 향해 전합니다.

 

 

 

 

20211119

흐린 가을 하늘 아래 책상에서 사색에 잠기면서

솔직한 마음을 털어 놓으며...

 

 

 

 

끝으로 현대 한글의 발자취를 기억하면서 느낀 감정을 일러스트로 표현했습니다.

 

그림의 내용은 세종대왕의 한글을 다시 발굴하여 근현대 한글을 새로 만든 것이나 다를 바 없는 헐버트 박사와 그의 제자인 주시경 선생 그리고 그 주시경 선생의 제자이신 한글학자 최현배 선생을 나란히 연장 선상에 놓았습니다. 한자를 중시하는 중화 성리학의 상징적인 인물(특별히 지목한 사람은 없습니다)의 망령을 뿌리치고 훈민정음을 든 채 헐버트 박사의 손을 잡아 새로운 땅으로 건너가는 세종대왕과 두 사람을 손으로 붙잡아 주며 돕고 있는 주시경과 최현배를 통해 한글의 역사는 이어지고 우린 그 역사의 결실을 맛보고 있다는 식으로 표현했습니다.